전통적인 입지 선정 방식이 위험한 이유는 정보의 불완전성 때문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건 ‘지금 이 자리를 지나가는 사람’뿐이다. 그들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무슨 질환으로 고민하는지는 알 수 없다.
AI 상권분석이 바꾸는 건 바로 이 정보의 질이다. 스타트닥터 같은 국내 플랫폼은 공공데이터, 신용카드 매출 데이터, 통신사의 유동인구 데이터를 통합한다. 공공데이터는 지역의 인구 구성을 보여주고, 신용카드 데이터는 성별·연령별·시간대별 소비 패턴을 드러낸다. 통신 데이터는 사람들이 언제 어디로 이동하는지를 24시간 추적한다. 이 세 가지가 결합되면 “이 지역 40대 여성은 평일 저녁 7시 이후 병원 방문이 많고, 인근 한의원과 내과 방문 빈도가 높다”는 식으로 입체적인 수요 지도가 그려진다.
더 중요한 건 AI가 발견하는 ‘보이지 않는 틈새’다. 만약 서울 목동에서 소아청소년과 개원을 고려한다면 어떨까. 그 지역엔 이미 소아과가 5곳이나 있다. 포화 시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AI는 통신사 유동인구 데이터에서 흥미로운 패턴을 포착할 수 있다. 평일 저녁 8시 이후와 주말에 30~40대 부모들이 아이를 데리고 반경 5km 밖의 대형병원 응급실로 이동하는 빈도가 높다면, 그건 미충족 수요의 신호다. 신용카드 데이터로 확인하면 그 시간대 인근 소아과들의 결제 기록이 거의 없을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소아과가 평일 저녁 7시에 문을 닫기 때문이다.

대치동 사례가 보여주는 건 차별화의 중요성이다. 경쟁 병원이 많다는 건 수요가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지만, 그 수요가 이미 충족됐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AI는 이 둘을 구분해준다. 단순히 입지를 고르는 게 아니라, 그 지역에서 어떻게 차별화될 수 있는지, 어떤 브랜드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지를 데이터로 보여준다.
미국 시애틀 버지니아 메이슨 메디컬 센터의 사례는 이를 실제로 증명한다. AI는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심 대신 도심에서 15분 거리의 주거 지역을 추천했다.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높고, 만성질환 관리 수요가 있으며, 자가용 이용률이 높았다. 무엇보다 인근에 노인 전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이 없었다. 센터는 그곳에 문을 열었고, 주차 공간을 확보하고 만성질환 관리 프로그램을 전면에 내세웠다. 결과는 기존 위치 대비 환자 유입률 45% 향상이었다.
AI가 찾아주는 건 단순히 ‘어디에 환자가 많은가’가 아니라 ‘어떤 환자가, 어떤 문제로, 어떤 시간에 병원을 필요로 하는가’다. 이 정보는 곧 타깃 페르소나가 된다. 야간 진료 소아과의 페르소나는 “평일 저녁 퇴근 후 아이의 갑작스러운 증상에 당황하는 30~40대 맞벌이 부모”다. 이 페르소나가 정해지면 모든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자동으로 그려진다. 네이버 블로그에는 ‘퇴근 후 아이 응급 증상 대처법’을 올리고, 인스타그램에는 “밤 9시에도 진료합니다”를 반복 노출하고, 인근 어린이집과 제휴해 ‘야간 의료상담 쿠폰’을 배포한다. 온라인 광고는 ‘지역명+소아과+야간진료’ 키워드로 집중한다. 입지 분석에서 시작된 정보가 타깃 설정을 거쳐 채널 전략으로, 다시 브랜드 정체성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경기도 분당에서 피부과를 개원한다면 다른 접근이 가능하다. AI 분석 결과 2030대 여성 인구는 많지만 피부과 경쟁이 치열하다면, 대신 4050대 남성 직장인 비율이 높고 이들의 점심시간 의료기관 방문 패턴이 두드러진다는 데이터에 주목할 수 있다. 하지만 남성 타깃 피부과는 거의 없다. 이 병원이 ‘남성 피부 전문’으로 브랜드를 설정한다면, 탈모, 지루성 피부염, 면도 후 피부 관리 같은 남성 특화 진료 항목을 내세우고, 인테리어도 차분한 톤으로 구성할 수 있다. 같은 피부과지만, 브랜드 정체성이 경쟁사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입지는 곧 타깃을 결정하고, 타깃은 곧 브랜드 정체성을 만들며, 브랜드 정체성은 곧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중심 메시지가 된다. 이 연결고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AI 분석 결과는 그저 숫자 나열로 끝난다. 하지만 이 흐름을 제대로 설계하면 입지 선정의 순간부터 병원의 브랜드가 구축되기 시작한다.
물론 AI가 만능은 아니다. 데이터는 ‘어디에 수요가 있는가’를 알려줄 뿐, ‘우리 병원이 그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는 별개 문제다. 야간 진료를 선택하려면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의료진 시스템이 필요하고, 남성 피부 전문을 표방하려면 실제로 남성 피부 질환에 대한 진료 역량이 있어야 한다. AI는 방향을 알려줄 뿐, 실행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하지만 적어도 AI는 틀린 출발을 막아준다. ‘많이 다니니까 될 거야’라는 희망 섞인 추측 대신, ‘이 지역은 우리 병원과 맞지 않는다’는 객관적 경고를 준다. 한국의 병원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를 넘어섰다. 이런 환경에서 차별화 없는 개원은 생존 가능성이 낮다.
앞으로 병원들은 입지 선정 단계에서부터 세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 첫째, 이 지역의 환자는 누구인가. 둘째, 그들이 해결하지 못한 의료 수요는 무엇인가. 셋째, 우리 병원은 그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 이 세 질문에 대한 답이 명확할 때, 병원의 브랜드 정체성도 명확해진다. 야간 진료 전문이든, 남성 피부 전문이든, 노인 전문이든, 명확한 정체성이 경쟁력이다.
AI 시대의 병원 개원은 부동산 계약이 아니라 브랜드 설계다. 입지를 고르는 순간 이미 우리 병원이 누구를 위한 공간인지, 어떤 가치를 전달할 것인지가 결정된다. 발품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데이터로 전략을 세우고, 그 전략을 브랜드로 만드는 시대다.
(글 : 김국주 헬스인뉴스 아카데미 대표강사)
임혜정 하이뉴스(Hinews)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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